1. 왜 선택을 멈춰야겠다고 결심했는가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 가지의 선택을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커피를 마실지, 무슨 음악을 들을지. 그 선택들 대부분은 작고 사소하지만, 그 양이 쌓이면 무시할 수 없는 피로로 돌아온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내 하루가 선택의 연속으로 인해 과도하게 소모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유난히 지치던 어느 평일 저녁, ‘내가 뭔가 큰일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그날 하루는 중요한 업무 회의부터 점심 메뉴, 저녁 약속, 심지어 넷플릭스에서 어떤 영화를 볼지까지 수십 번의 선택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내가 오늘 하루, 어떤 것도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지낸다면?’ 그래서 실험을 시작했다. 결정하지 않는 하루. 선택을 내려놓는 하루. 이건 단순한 게으름이나 회피가 아니라, ‘선택하지 않음’이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를 관찰하는 실험이었다. 목표는 단 하나, 내 정신 에너지를 ‘선택’이 아닌 ‘집중’에 쓰는 것. 그리고 그 하루가 내게 어떤 메시지를 줄지 지켜보는 것이었다.
2. ‘자동화된 하루’를 위한 사전 설계
선택하지 않으려면, 그만큼 철저하게 하루를 미리 설계해야 했다. 선택을 줄이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자동화된 루틴 만들기’였다. 전날 밤, 나는 다음 날의 모든 루틴을 미리 정리해 두었다. 몇 시에 일어날지, 아침에 먹을 식사는 뭘로 할지, 어떤 옷을 입을지, 언제 어떤 일을 할지, 점심은 뭘 먹고 어디서 먹을지까지. 마치 미리 짜놓은 여행 일정표처럼, 내 하루는 이미 정해진 흐름 안에서 흘러가야 했다.
옷은 전날 밤에 세트로 걸어두었고, 아침 식사는 냉장고에 미리 준비해뒀다. 스마트폰은 하루 동안 알림을 꺼두고, SNS는 차단 앱을 통해 접속을 막아뒀다. 점심 메뉴는 가장 가까운 편의점 도시락 중 한 가지로 고정했고, 업무는 2시간 단위로 정해진 일정에 맞춰 타이머를 켜며 진행했다. 선택지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선택을 피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전략이었다.
물론 완벽히 선택을 배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건 ‘선택이 아닌 루틴에 따라 움직이려는 태도’였다. 결정이 아닌 흐름에 몸을 맡기자, 생각보다 더 편안한 하루가 펼쳐졌다.
3. ‘결정하지 않는 하루’에서 발견한 여유
놀랍게도, 선택을 줄인 하루는 생각보다 훨씬 자유롭고 가벼웠다. 평소 같았으면 고민했을 여러 상황에서 ‘이미 정해진 대로 하면 돼’라는 생각은 엄청난 심리적 해방감을 줬다. 옷장을 열고 10분간 고민하던 시간은 사라졌고, 점심 메뉴를 고르기 위해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일도 없었다. 심지어 업무 중에도 ‘다음엔 뭘 할까’라는 질문 없이 미리 정해진 흐름을 따라가니, 집중력이 더 높아졌다.
무엇보다도 놀라웠던 점은, 자기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것이다. 선택을 하지 않으니 머릿속이 텅 비고, 그 여백 안에 나의 본심이 고요하게 떠올랐다.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자, 오히려 내 삶의 우선순위가 더 뚜렷해졌고,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소음이 줄어들자 멀리서 들려오는 미세한 음악이 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선택하지 않는 하루'는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작은 실험이었지만, 하루를 살아낸 후의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 동안 불필요한 선택을 최소화했을 뿐인데, 정신적으로는 마치 휴가를 다녀온 듯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이 감각을 반복하고 싶어졌다. 실험이었던 하루를 넘어, 이 경험을 삶의 시스템으로 전환해 보기로 결심했다. 핵심은 ‘반복 가능성’에 있었다. 즉, 다음 날도, 그 다음 주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는 구조와 습관을 만드는 것이었다.
우선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고정식 루틴’ 만들기였다. 예를 들어, 매주 월요일은 '현미밥 + 계란장 + 나물 반찬'이라는 고정 식단으로 점심을 정했다. 화요일은 김밥, 수요일은 샐러드처럼 요일별로 메뉴를 정해두니, 매번 “오늘 뭐 먹지?”라는 질문에서 해방되었다. 처음엔 재미가 없을까 봐 걱정했지만, 반복은 오히려 나에게 안정감을 줬고, 음식 외에 다른 중요한 결정에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게 되었다. 매번 같은 메뉴라도 음식이 내게 주는 의미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늘은 수요일이니까, 샐러드의 날이지.” 작은 예측 가능성은 삶을 정돈해주었다.
두 번째로 바꾼 건 아침 루틴이었다. 기상 후, 핸드폰 확인 → 물 한 잔 마시기 → 5분 스트레칭 → 짧은 명상 → 아침 식사까지의 흐름을 매일 동일하게 유지했다. 이 루틴은 나를 ‘생각 없이’ 움직이게 했다. 좋은 의미의 생각 없음, 즉 불필요한 고민을 하지 않고 몸이 자동으로 흘러가도록 만든 구조화였다. 루틴은 게으름의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시스템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루틴을 반복의 지루함으로 오해하지만, 나에게 루틴은 '선택 피로'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방패가 되었다.
물론 모든 걸 자동화하는 건 불가능하다. 인생엔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많고, 때로는 즉흥적인 판단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모든 결정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미리 생각해둔 프레임 안에서 주요 결정을 미리 덜어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정해야 할 영역'과 '루틴으로 고정할 수 있는 영역'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업무 시작 시간은 고정했지만, 어떤 업무부터 할지는 유연하게 열어두었다. 일정 시간 동안은 '루틴 모드', 그 외에는 '창의 모드'로 나를 운영하는 셈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느낀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정신 에너지의 회복이었다. 루틴이 익숙해질수록, 나는 더 많은 에너지를 창의적인 일에 쓸 수 있었고, 중요한 결정 앞에서도 훨씬 또렷한 판단을 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하루의 중반쯤만 되어도 피로감이 몰려왔는데, 지금은 하루의 끝까지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은 작은 습관이 쌓여 만든 큰 변화였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루틴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처음엔 완벽하게 해보려다 오히려 실패한 날도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한 번의 성공'이 아니라, 꾸준히 반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오늘 실패해도, 내일 다시 같은 시간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길을 걸으면 된다. 반복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결정하지 않는 하루에서 시작된 이 실험은 이제 나의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지금도 나는 중요한 선택은 스스로 하고, 불필요한 선택은 미리 정해둔 루틴에게 맡긴다. 그리고 그 구조화된 삶 속에서, 나는 더 자유롭고, 더 명확한 내가 되어가고 있다. ‘선택하지 않음’은 결국 내가 더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가장 단순하고도 강력한 방식이었던 것이다.